「윤미네 집」
윤미가 태어나서 시집가던 날까지
사진 전몽각 출판 포토넷 출간 2010.01.01
초 가을 날씨를 기대하며 나선 날, 그러나 가을과 여름의 사잇길에는 파란 하늘과 아직 따끔따끔 한 햇살이 있었다. 습기가 없는 따가움을 느끼는 그날 나는 서촌,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2-3평 되는 작은 독립서점 이라선을 찾아갔다. 독립서점에서 책을 구입하게 된 계기는 이렇게 분위기 좋다고 구경만 하면 독립서점이 어떻게 살아가겠냐 싶은 부담감에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씩 골라 구입하곤 했는데, 요즘엔 그 서점의 주인의 취향을 읽어보는 재미로 한 권을 구입하게 된다.
서점 주인이 얼마나 고심하며 하나하나 책들을 골랐을까 싶어 나도 조심스럽지만, 그중에 내 눈에 띈 책 한 권은 시선이 잘 닿지 않는 무릎만 높이에서 빨간 책등으로 꽂혀있던 책이다. 오래전에 구입하려고 목록에 올려놓았으나 아직 사지 못한 「윤미네 집」이었다. 남의 집 생활사가 뭐 그리 궁금할 까 싶지만, 그 시절 남편의 영국 유학 중에 타국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느라 지친 나에게 사진작가가 사위와 함께 미국을 딸을 보낸 아버지의 마음으로 딸을 그리워하며 발간한 가족사진집이 왠지 내 마음을 위로해 줄 것 같았다. 이 책을 인터넷 서적 구입목록에 넣어놓고는 내내 해외배송비가 무서워 주문하지 못하다 아주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서점에서 발견한 이 제목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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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한번, 돌아와서 남편과 한번, 또 아들에게 보여주느라고 한번, 그리고 나혼자 가만히 다시 한번... 이 사진첩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는지 모른다. 윤미네 집이 주는 놀라운 영향력은 이 사진집을 보는 즉시 내 아이의 모든 사진을 찾아 그 아이가 집을 떠날 때쯤에 사진집을 책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소망을 심어주고, 친정에 들르면 우리네 가족사진들을 모아다가 책 한 권 만드는 일을 꼭 하고 싶게 만드는 결심을 심어준다는 점이다. 평범한 가족이라면 누구나 있었을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이 오버랩되어 떠오르면서 추억과 행복에 잠기게 하는 사진. 「응답하라 1988」 드라마처럼 그 시대를 살았으면 공감할만한 따뜻한 가족들의 이야기가 말하지 않아도 그 시선 하나하나, 그 손길 하나하나, 그 걸음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다. 마치 그 장소에 있는 듯한 집 냄새, 음식 냄새, 꽃냄새마저 상상하게 만드는 깊은 공감이 마음속에서 피어오른다.
윤미네 집은 아이가 세 명, 우리집은 아이가 네 명 그 많은 식구들이 한 상을 펴서 세끼 식사를 하고 변변한 관광시설이나 멋진 인테리어가 있는 카페도 놀이시설도 없는 그때에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시끌벅적 즐거웠던 1970년대 그때로 돌아가는 감동이 느껴진다.
윤미네 집
윤미네 집
사진을 사랑했던 생활인, 고 전몽각 선생의 사진집. 수많은 독자들이 헌책방을 돌며 애타게 찾던 <윤미네 집>이 20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초판본만 1990년 약 1,000부가 출간됐다. 초판본에 실렸던
book.naver.com
눈을 뜨지 않은 갓난아이, 젖을 맛있게 빠는 모습, 할아버지 댁 나들이,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모습, 조그만 마당에서 노는 모습, 제 엄마와 형제들과 뒹구는 때,
집근처 야산에서 들꽃이며 풀 사이를 헤집고 잠자리 나비를 쫓는 모습,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갈 때, 가족이 함께 자전거 하이킹을 다닐 때, 아이들의 심통 부리는 얼굴,
방학 때면 집과 가까운 북한산에 오르고 가족캠핑이니 썰매를 탈 때, 대학 합격 발표가 있던 날,
윤미의 혼인날을 받아두고....
그 모든 장면들은 너무나도 소중했다. 아이들은 우리 부부에게 자랑이요, 기쁨이었다.
5쪽
사진 중에 윤미가 아이스크림을 들고 우는 사진이 있다. 남편과 나는 이 사진을 보면서 왜 이렇게 울고 있을지를 추측해보았다. 남편은 더 먹고 싶은데, 엄마가 자러 가야 한다고 해서라고 이야기했고, 나는 아이스크림이 떨어져서 슬퍼하는 게 아닐까 라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진첩 뒤에 그 장면들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윤미가 동네 산책을 하는데 윤미는 동네 언니들 공기놀이에 관심이 많다.
저도 한몫 끼겠다지만 통할리 없고 호되게 애들한테 야단만 맞는다.
집에서야 저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지만
그것이 그토록 서러워 좋아하는 얼음과자도 안 통하고 저녁 내내 울어댔다.
윤미도 이제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156쪽
작품을 찍은 작가의 일기를 보듯, 글과 함께 감상하니, 아빠의 행복한 마음이 더 전해져 온다. 윤미네 집은 사랑이고 행복이고, 추억이고, 그리움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다. 신기하게도 사진을 보면서 그 사진 너머에 사진을 찍는 아버지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피사체를 선택하고 그 순간 그 동작을 선택하는 아버지의 자애롭고 섬세한 그 감각을 함께 생각하게 된다. 얼마나 그 대상을 사랑했는지 느껴지지 때문에 그의 아이들과 그의 아내를 찍은 이 사진집이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닐까? 순간은 사진으로 추억이 될 때 더욱 값진 보석으로, 향기 나는 꽃으로 마음에 새겨지게 된다.
윤미네 집 사진집은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해 줬다. 나의 가족에 대한 고마움을 그리고 그 소중함을 느끼게 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 이런 깨달음을 주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사진의 진솔함이 주는 커다란 감동이 오늘 가족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바꾸게 한다. 가족에게 안부를 묻고 함께한 시간을 감사하게 하고 돌보아준 그 사랑에 가치와 깊이를 느끼게 한다.
이것이 자신의 가족의 삶을 당당히 사람들에게 자랑했던 아마추어라고 하기엔 그 깊이가 헤아리기 힘든 전몽각 작가님이 바라셨던 게 아닐까 싶다. 마이 와이프의 마지막 장의 사진, 할머니의 가다랑이 사이에서 젖병을 물고 있는 손자 사진이나, 손자와 함께 신나게 막춤을 추고 있는 아내의 그 모습이 또한 나의 모습이 되길 바란다. 그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진정 인간으로 태어나서 소풍처럼 즐기다 왔노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작가가 죽기 전에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생각했듯, 나도 그런 행복한 추억이 가득한 인생을 살고 싶다.
윤미네 집이 변함없이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가족을 향한 그 따뜻한 아버지의 사랑과 그 사랑을 사진으로 기록하고자 한 열정,
그리고 사진집 이 면에 드러나는 전몽각 선생의 삶을 사랑하는 방식 때문일 것이다.
가까이 있는 것을 더 아끼고 매 순간 사라지는 것들을 사랑하며,
지나온 삶을 아름답게 추억하는 자기 사랑.
그 사랑이 가슴에 와닿으면,
내일의 기억을 위해 오늘의 자기와 자기 삶을 기록할 수 있다.
165쪽
그날 저녁 아빠한테 전화를 했다. "김서방 하고 전화를 했는데, 누구? 느그 형부 말이다. 한밤중에 저기 부천까지 딸내미 데리러 간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그랬다. 니 딸내미 그렇게 애지중지 끼고 이쁘냐? 그래 봤자 소용없다. 금방 다른 놈 좋다고 가버리니까. 야, 이놈아 내가 내 딸 보낼 때 마음 어떨지 이제 쪼까 알 것 같냐?"
아, 큰 조카 유희가 나이가 언니 시집갈 나이만큼 자랐구나....
'데려가 줘서 고맙다'와 '강도 같은 놈'이라는 말이 동시에 붙는 사람이 바로 사위다. 딸을 시집 보낼 때는 이유 없이 화가 난다고 하신다. 평소에는 아무 말 없으시다가 술만 드시면 거실에 바이닐 레코드를 틀어놓고 딸들과 왈츠를 즐기시는 로맨티시스트 우리 아버지.. 그제야 나오는 진심은 사랑한다... 내똘(내 딸) 내 볼에 닿는 아버지 입술에서 시큼한 와인 냄새와 묵직한 체취가 느껴진다.
두 딸 다 무사히? 시집가서 잘 살고 있어 안심이 되면서도, 내내 딸들이 살면서 힘겨운 일, 가슴 아픈 일 생길 때마다 담배만 뻐금 뻐금 피워대고 한마디 떼기도 어려워하셨던 그분, 나의 아버지....
몇 년이나 남은 것일까 나의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는 날들이 그리고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더 시간이 흐르기 전에 내가 카메라를 들고 그 모습을 더 남기고 싶다. 더 많이 그리워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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