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그리고 사람
취향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
살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그중 소수, 나에게 본질적이면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삶의 지혜와 예술적 영감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더 나아가 그 사람과 시간을 보내며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함께 나누고 소통하며 공감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만나면 사막의 오아시스, 방전된 오디오에 에너지를 채워주는 듯한 그런 사람들.
책에서 저자는 자신에게 이런 사람들을 꽃으로, 식물로 해석한다. 달리 말하면 식물 비유법이라고 할까? 자신이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과 존경과 감사가 책에 배어있다. 어쩌면 그 사람들을 향한 일종의 헌화 같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러스트 작가 손정민은 패션잡지쪽에서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며 사람들을 만나왔기에 독자들은 작가의 인간관계를 통해 매력 넘치는 서울과 뉴욕의 힙스터_자신들만의 고유한 패션과 음악 문화를 좇는 부류_들의 삶에 대해서도 잠깐 엿볼 수 있다. 잡지나 SNS, 미디어를 통해 보고 듣는 그들의 화려한 삶이 아닌 그의 친구에게서 듣는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즐거움, 커피숍 뒷자리에서 앉아 살짝 엿듣는 듯한 재미라고나 할까.
손정민 홈페이지
식물 그리고 사람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닮은 식물을 그리다일러스트레이터 손정민의 그림과 글을 담은 『식물 그리고 사람』이 미메시스에서 출간되었다. 특유의 아름다운 선과 색상으로 유명한 손정민은
book.naver.com
이 책은 누구의 추천을 받았거나 유명해서 고른 책이 아니다. 지극히 사적인 취향과 생활 반경을 무대로 일러스트 작가인 손정민의 손때와 향기가 듬뿍 묻어있는 책이다. 자연스러운 손글씨체와 감각 있는 수채화 작품을 구경하기에도 좋다. 한마디로 이 책은 이쁘고 고운 책이자, 작가가 '이곳에 가보세요'라고 추천하지는 않았으나 그녀가 자주 가는 카페와 레스토랑, 베이커리, 옷가게, 악세사점, 꽃집을 방문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가게의 주인장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으니, 직접 만나서 확인해보고 싶은 궁금증이 들게 한다.
최근 들어 알게 된 디제이 소울스케이프(DJ Soulscape)라는 뮤지션이 있다. 보랏빛 재즈 빛깔 물씬 풍기지만 발걸음은 가볍게 만드는 세련된 음악에 푹 빠져 들었다. 그런데 책에 그에 대한 글이 있어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책에 나온「 summer 2002」라는 곡을 찾아들어보니 역시 그의 곡이라는 느낌이 꽂히는 곡이었다. 이렇게 내 생각과 동일하게 공통분모를 발견하면 왠지 작가 하고도 말이 잘 통할 것 같은 나 혼자만의 착각도 들게 하는 책이다.
summer 2002 디제이 소울스케이프(DJ Soulscape)
식물과 인물을 짝지은 책이니 만큼 인물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꽃이나 식물을 찾아 읽어보는 재미도 솔솔 하다. 작가의 취향이 세련된 탓에 한 번도 실물을 보지 못한 일반적이지 않은 꽃과 식물의 종류가 많고 그렇기에 그림을 보고 약간의 상상력을 더해 실제의 꽃을 떠올려본다. 내가 좋아하는 목련꽃도 있고 동백꽃도 있으니 과연 그런 인물과 짝지어진 인물은 어떤 사람들일까? 목련꽃과 비슷한 매그놀리아 꽃의 주인공은 손경완 가방 브랜드 콰니의 대표. '그녀는 일을 할 때 결정은 분명하고 판단과 실행은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며 태도는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한다. 동백꽃의 주인공은 SGJ 스튜디오의 액세서리 디자이너 자매다. '늘 단정하고 예의 바른 언니들에게 어디엔가 동백꽃 같은 이미지가 있다'고 했다. 그들의 작품과 상품들을 보니, 그것 역시 주인과 닮았는지 유심히 들여다보게 된다.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지인들도 있지만, 대부분 자기만의 일을 개척해 스스로 브랜드를 만들어 가는 아티스트들이 많다. 작가의 삶에는 이렇게 멋지고 쿨한 관계들만 있지는 않았겠지만, 꽃보다 더 아름다운 자신의 사람들을 평생 두고두고 아끼며 살아가고자 하는 그녀의 마음이 더 이쁘게 느껴진다. 바쁜 일상에서 만나는 고요한 자연처럼, 열심히 인생을 걸어가다 보면 만나는 사람들 속 향긋한 냄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듬뿍 담긴 이 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나의 그들은 나에게 어떤 꽃일지, 또 나는 그들에게 어떤 꽃일지 상상해본다.
생각보다 큰 공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길고 큰 나무들, 무성한 풀, 흙, 야생꽃이 풍기는
일상의 냄새들이 가만히 정지해 있다.
에필로그 173쪽
이 책은 효자동에 있는 더 레퍼런스 예술서점에서 구입했다. 지하에 있는 작은 전시관을 둘러본 후, 올라간 2층은 서점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서재에 더 가까워 보이는 편안한 공간이다. 그중 카운터 옆에 올려진 「식물 그리고 사람」은 내용보다는 딱 내 취향이다 싶어 구입한 책이지만, 공감 가는 내용도 많아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편안히 읽었다.
더 레퍼런스 홈페이지
'독립서점과 책 한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선으로부터 (0) | 2021.10.19 |
---|---|
윤미네 집 (0) | 2021.09.06 |
나무처럼 살아간다 (0) | 2021.08.27 |